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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아빠의 죽음에 안도…‘죄’가 아니다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7)]

  • 관리자
  • 202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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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죽음에 안도…‘죄’가 아니다

박상희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7) 열 살의 공포에서 이젠 벗어나세요

한때는 가장이 가족 모두를 살해하고 자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고 말한다. 잘못된 가부장적 사고에 사로잡힌 이에 의해 일어나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은 중대한 범죄이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최악의 어려움에 놓인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의 최소한의 의무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한때는 가장이 가족 모두를 살해하고 자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고 말한다. 잘못된 가부장적 사고에 사로잡힌 이에 의해 일어나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은 중대한 범죄이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최악의 어려움에 놓인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의 최소한의 의무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상담 신청

그 사람은 아빠의 술친구였어요. 10살이었던 제가 혼자 있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집으로 왔어요. 흉기로 저를 위협해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순간 엄마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일하다가 잠시 집에 들렀다고 했어요. 그는 도망갔어요. 그 후 마을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제게 얘기하면 다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저는 정말 무서웠고, 이 일을 알게 되면 엄마와 아빠가 싸울까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명절이었는지, 특별한 날이었는지,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어요. 아빠가 사업에 실패해 우리는 시골 할아버지 집 근처에 내려가 살고 있었어요. 그 날 아빠는 돈을 주지 않으면 농약을 마셔버리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집은 담배농사를 짓고 있어서 늘 농약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가 가족 앞에서 그 농약을 마셔버렸어요. 아빠 나이 37세였어요. 아빠는 리어카로 읍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저녁에 죽은 몸이 돼 다시 리어카로 실려 왔어요.

어렸을 때 저는 왕따였어요. 친구들은 저를 ‘4차원’이라고 불렀어요. 저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제 머리 속에는 선악이 공존했거든요.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어요. 어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회사 동료들이 누군가를 뒷담화하면 저는 낄 수가 없었어요. ‘악과 선은 같이 있는데 어떻게 누군가를 악하다고 얘기할 수 있나. 온전히 선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저는 왕따가 돼 있더라고요.

47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얘기를 오늘 선생님에게 할게요. 이유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저처럼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고 나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에요. 다른 하나는 선생님이 제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아빠가 농약을 마시자마자 할머니가 뛰어가서 구정물통을 가지고 왔어요. 시골 농가에서 구정물은 위세척액 같은 것이에요. 구정물을 바로 들이키면 농약을 토해낼 수 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가 가지고 온 그 구정물통을 엄마가 발로 차버렸어요. 엄마는 그것을 실수인 것처럼 얘기했어요.

하지만, 글쎄요. 그것은 하늘과 엄마와 아빠만 알았겠죠. 할머니는 그 후 엄마를 미워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놀란 표정을 짓지만, 사실 그때 저는 엄마를 이해했어요. 아빠가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제가 느낀 것은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이었어요.

아빠는 키도 크고 잘생긴 분이었어요. 하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술과 노름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엄마와 자주 싸웠어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아빠는 술 취한 날 몇 차례 제 목에 칼을 대고 ‘너희는 내 자식들이니 내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야한다. 엄마는 남이니 데리고 갈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아빠는 우리 남매를 먼저 죽이고, 자신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럴 때마다 저는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아빠가 없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때 제 나이가 10살이었어요. 저는 여전히 그 무서움 속에서 떨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두렵고,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그냥 참고 감수해요.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저를 이해하지 못해요.

박상희 소장이 상담을 진행하며 내담자의 사연을 경청하고 있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박상희 소장이 상담을 진행하며 내담자의 사연을 경청하고 있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상담 내용

솔직히 말씀드리면 충격적이었어요. 남편을 살릴 수 있는 구정물통을 발로 찼다는 말을 듣고 제 표정을 숨길 수 없었어요. 미안합니다. 하지만 10살 소녀가 느낀 죽음의 공포를 공감한 후에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영옥(가명)씨 어머니가 구정물통을 일부러 찬 건지, 실수로 엎은 건지 알 수 없지만, 후자라 해도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절박한 모성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옥씨가 느낀 혼란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빠가 눈앞에서 죽어 무섭고 슬펐는데, 동시에 안도감이 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사실이 어린 아이에게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겠어요. 그 때부터 영옥씨는 선과 악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모든 걸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가족비밀’로 숨겼기에 혼란이 어린 소녀의 마음과 머리에 굳은 신념처럼 자리 잡게 됐을 거예요.

상담을 신청한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말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감정을 분리시켜 이성적 방식으로 문제에 대처하는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방어기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굳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영옥씨와 이야기를 나눈 후 제 추측이 맞았음을 알게 됐어요.

이제라도 선과 악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영옥씨는 그 유괴범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는데, 아니에요. 틀렸어요. 유괴는 악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좀 냉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아버지의 비극적 결과가 슬프고 안타깝지만, 아버지의 행동은 악한 것입니다. 직계비속 살인미수에 가까운 것이에요. 그리고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 역시 절대로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영옥씨에게 정말 어려운 것은 본인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악일 것이에요. 아버지가 죽었는데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을 악하게 여기게 했을 거예요. 10살의 소녀는 아무 잘못도, 의도도 없는 선한 아이였으니 결국 선과 악의 문제는 풀 수 없는 의문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영옥씨. 그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예요. 사랑하는 아빠가 돌아갔으니 슬펐지만, 내 목숨을 위협하던 위험이 사라졌으니 안도감을 느낀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그러니 안도감을 느낀 것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영옥씨는 악한 존재가 아니었어요.

이제라도 마음 속 10살 그 아이를 의심하지 말고 달래 주세요. “너 때문이 아니야. 아빠의 잘못된 행동이야. 너는 슬프면서도 안심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어” 라고 말이에요. 모든 게 아빠의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아빠의 존재를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

현재의 가족 이야기를 해보지요. 상담을 통해 영옥씨가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않아도 혼자 억척스럽게 돈을 벌며 괜찮다고 하고, 시댁 식구의 구박도 대부분 억울한 말들이었지만 모르는 척 견디기만 해온 이유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런 패턴은 그 어린 10살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혼자 참고,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해요. 영옥씨를 더욱 주눅 들게 하니 이젠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이제 영옥씨는 환갑을 앞둔 어른입니다. 10살 아이를 벗어나는 데 47년이 걸린 지난 시간은 그동안 영옥씨가 현실이 아닌 마음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이제는 현실로 나오도록 하세요. 영옥씨를 상담하면서 저는 영옥씨의 본래 성격이 밝고, 활발하고, 유쾌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무대 위 강사를 꿈꾸는 참으로 멋진 영옥씨. 이제는 부디 어린 시절의 공포에서 벗어나 즐겁고 유쾌한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길 바랍니다.

■후기

한 때는 가장이 가족을 살해하고 자기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고 말한다. 물론 얼마나 삶이 괴로우면 이런 선택을 할까 하는 안타까움에 일방적으로 비판하기 쉽지 않은 주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배우자와 아이들의 생명이 가장의 소유가 아니라 배우자와 아이들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잘못된 가부장적 사고에 사로잡힌 이에 의해 일어나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은 중대한 범죄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최악의 어려움에 놓인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의 최소한의 의무다.

박상희 소장은

아빠의 죽음에 안도…‘죄’가 아니다

이화여대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위의 사례는 유튜브 채널 ‘박상희의 심리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인 무료심리상담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에서 2월21일부터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사진/기사 출처: 경향신문>


<기사원문> 


https://www.khan.co.kr/life/health/article/202202182137002

 

 

<Youtube 박상희의 심리 스튜디오>"10살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