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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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분노·죄책감에 연민까지 감내하느라 고생했어요, 이젠 자기 자신도 용서해주세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6)]

  • 관리자
  • 2022-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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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죄책감에 연민까지 감내하느라 고생했어요, 이젠 자기 자신도 용서해주세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입력
 
[경향신문]
내가 피해자인데…왜 자책도 내 몫일까요?



■상담 신청

아빠는 수갑을 가지고 있었어요. 젊었을 때 형사였다는 소리도 들었고, 청계천에서 샀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제게 수갑은 이 세상 물건 중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에요. 남들에겐 죄인을 잡는 물건이겠지만 제겐 엄마를 묶었던 물건이에요.

아빠는 술이 취해 들어와서 자주 엄마를 때렸어요.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급기야 엄마 손에 수갑을 채워 동네에서 끌고 다녔어요. 엄마는 안끌려가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럴수록 더 땅바닥을 구르며 끌려갔어요. 온몸이 긁혀 여기저기서 피가 났어요. 동네 아줌마들은 무서워 도와줄 생각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어요. 아저씨들이 와서야 중단됐어요.

엄마는 그 때 집을 나갔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그 오랜 시간을 그렇게 맞고 살진 않았을 거예요. 나중에 제가 왜 그때 안나갔냐고 물어보니 그 끔찍한 지옥에 어린 너희를 두고 갈 수 없었다고 했어요. 미안하고 슬펐어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아빠는 집을 나갔어요. 15년 동안 들어오지 않았어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 거예요. 아빠가 바람 나 집을 나갔는데 이렇게 좋아했던 딸이 또 있을까요? 아빠 월급이 없어지니 생활은 어려워졌지만 엄마가 일할 수 있으니 괜찮았어요. 돈 없어도 아빠 없는 것이 돈 있고 아빠 있는 것보다 100배는 좋았어요.

그런데 5년 전 다시 괴로움이 시작됐어요. 제가 서른 살이 다 된 어느 날 아빠가 집으로 돌아온 거예요. 죽을 병이 걸린 채로요.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엄마 인생을 파탄내고 우리 어린 시절을 다 망쳐놓은 그 나쁜 남자를 엄마가 알아서 내쫓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집에 있게 하는 것이에요. 아픈 사람 길거리에서 죽게 할 순 없지 않냐면서요. 남동생은 독립을 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저는 그 끔찍한 아빠와 다시 살게 됐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그 사건이 일어났어요.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일을 쉬게 된 제가 아빠와 둘이 집에 있게 됐어요. 어쩌다가 어릴 적 얘기가 나왔는데, 말싸움이 시작되고 감정이 격해졌어요. 저는 결국 참지를 못했어요. 화가 나 잠시 정신을 잃고 주먹으로 아빠 얼굴을 후려 쳐버린 거예요. 아빠는 저를 때리지 않더라고요. 그날부터 저는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겠어요.

지긋지긋한 얘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그 후 아빠는 1년 넘게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로 집에서 지냈고 병수발을 제가 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빠의 인생에 대해 조금은 연민이 생겼던 것 같아요. 한 때 기고만장했던 아빠의 병든 모습에 눈물이 쏟아지곤 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아빠는 돌아가셨어요.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저는 깊은 우울증의 수렁에 빠져버렸어요. 아빠가 이제 없으니 제 불행에 대해 원망할 사람도 없어요. 도리어 아빠를 때린 패륜아라는 죄책감에 괴로워요. 나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일 뿐이잖아요. 가해자의 똥과 오줌을 모두 받아내면서 그 젊은 시절을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힘들게 병수발하면서 보냈는데요. 왜 저는 이렇게 초라한 우울증 환자가 돼 버렸을까요? 내 삶은 왜 이렇게 황폐한 건가요?

박상희 소장이 상담을 진행하며 내담자의 사연을 경청하고 있다.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상담 내용

저의 오랜 내담자인 경숙씨!(가명) 그동안 많은 내담자들을 만났지만 저는 경숙씨의 말들이 유난히 잊히지 않아요. 경숙씨가 겪은 상황들이 영화처럼 떠올라서 그런 것 같아요. 엄마가 수갑에 채워진 채 마을을 끌려 다녔을 때 어린 경숙씨는 얼마나 슬프고 놀랐을까요.

20년이 넘게 상담하면서 제가 얻은 깨달음의 하나는 누구든지 맞으면 안된다는 거예요. 폭력으로 인한 상처의 뿌리는 너무 깊어서 어떤 마음의 상처보다 커요. 그리고 오래 가게 돼요. 폭력은 한 사람의 자존감을 짓이겨버리는 행동이에요.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서 늘 지치고 힘들어요.
경숙씨는 정말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 같아요. 수갑이 채워진 채 동네에서 끌려 다녔던 엄마를 보며 느꼈을 슬픔, 서러움, 공포. 15년 만에 병이 걸려 들어온 아빠에 대한 미움과 경멸과 분노. 이런 감정들만으로도 너무 버거운데 거기에 큰 자책감과 죄책감까지 더해졌으니 말이에요.

상담자인 제게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경숙씨의 죄의식이에요. 아빠를 때린 그 순간부터 깊은 자책감의 수렁에 빠져들게 됐을 거예요. 경숙씨는 자신을 호로자식, 패륜아라고 표현했어요. 부모가 자식을 때린 것에 대해선 사회의 시선이 관대해요. 하지만 그 반대로 자식이 부모를 때린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 여겨요. 타인의 시선도 이러하지만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게 돼요.

게다가 경숙씨처럼 착한 사람일 경우에 마음은 더 괴로워요. 우리가 어떤 상대에 대해 분노의 감정만 있다면 그를 대하는 심리 메카니즘은 심플해요. 미워하고 증오하면 돼요. 그러나 같은 상대에 대해 상반된 감정인 죄책감과 연민이 더해진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이 혼란스러운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마음의 병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아빠가 떠난 그 시점에서 경숙씨의 우울증이 시작됐을 거예요. 경숙씨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이 저는 당연했다고 생각해요. 분노에, 죄책감에, 연민까지 뒤섞여버린 복합적인 감정은 그 누구라도 감내하기 어려운 거예요. 게다가 대상이 사라져 버렸으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 대상은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되고요.

경숙씨, 이제는 과거를 털어내야 해요. 부모님도 용서하고 자기 자신도 용서하길 바래요. 어린 시절 공포의 기억도, 아빠를 때렸던 죄책감도, 아빠에 대한 연민도 다 지나갔음을, 쉽지 않겠지만 받아들여야 해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용기 내어 인정해야만 당신만을 위한 당신의 삶을 시작할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아빠에 대한 미움과 공포는 당연한 거였어요. 아빠를 때린 후 죄책감도 피할 수 없는 거였어요. 그리고나서 아빠에 대한 연민이 생긴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사랑과 미움으로 뒤엉켜 있어요.

더 이상 자신을 학대하지 마세요. 다시 한 번 말하면, 용서하세요. 아빠를 때린 것에 대해 경숙씨 스스로 충분히 자신을 처벌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경숙씨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인생의 마지막에서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봐주는 경숙씨에게 아빠도 미안했을 거예요. 자신의 젊은 날의 행동들이 후회스러웠을 거예요.

큰 눈으로 한 번 보길 바래요. 아빠는 거친 삶을 살았고 고통스러운 병에 걸렸지만 그래도 가족 품에서 용서받고 세상을 떠났어요. 엄마는 남편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용서해 준 훌륭한 부인이고요. 무척 힘들었지만 잘 마무리된 부모님 이야기에요. 경숙씨 당신만 희생자로 남아 있을 건가요? 이제는 당신 자신만 생각하세요.

우울증은 치료할 수 있는 병이랍니다. 경숙씨가 용기 내어 요청한 심리상담도, 약물치료도 다 옳은 선택이예요. 당신을 돕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경숙씨 스스로 자기 삶을 찾고, 가꾸려는 의지랍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우울의 터널은 결국 종점에 도달한답니다. 햇빛이 비치는 길이 열린답니다.

■후기

지난 6년, 사건사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인 ‘사건반장’ 패널로 활동했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최근 경찰과 지자체가 과거보다 신경을 더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19에 가족폭력 신고가 들어가면 취소가 됐어도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확인한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잔인해지고 있다. 또 여전히 가족 내 일로 치부되고 있다. 잊기 어려운 심리적 내상을 입고 거리를 떠도는 10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사회 구석 어딘가로 숨어버리는 아내 등 가정폭력의 그림자가 짙다. 가정폭력의 적극적인 공론화와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공공의 과제다.

박상희 소장은

이화여대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위의 사례는 유튜브채널(박상희의 심리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인 무료심리상담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에서 1월 17일부터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무료심리상담 신청 sharonewh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