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상담위원들의 칼럼입니다.

[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놓지 말아요, 마침내 발견한 당신의 ‘빛’을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1)]

  • 관리자
  •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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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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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지 말아요, 마침내 발견한 당신의 ‘빛’을[경향신문]

시민 정신건강이 심상치 않다. 멀리는 1997년 외환위기부터, 가까이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시작한 이후 적지 않은 시민들의 정신건강에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외로움, 두려움, 불안감, 우울감, 좌절감, 높은 자살률 등에 대해선 제도적 해법도 중요하지만, 심리상담적 처방 역시 필요하다. ‘구해줘! 내 맘’은 시민건강 증진을 위해 마련된 심리상담 프로젝트다. 이번 연재는 신청을 받아 주인공을 선정하고 면접을 통해 문제와 상황을 파악한 다음 심리검사, 심리상담 및 코칭을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치유와 회복의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려는 것이 ‘구해줘! 내 맘’이 품고 있는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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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정신건강연구소 제공


■ 상담 신청
필리핀에서 늘 혼자였어요. 말이 좋아 유학이지 사실은 중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공부도 못하니까 필리핀으로 쫓겨난 거예요. 8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어요. 오라는 사람도 없었고, 돌아오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했어요. 낯선 나라에서 방 안에만 처박혀 지냈어요.군대 때문에 겨우 돌아왔어요. 제대하기 싫었다는 사람 얘기를 들어본 적 있으세요? 저는 군대 시절이 제일 좋았어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한국말을 쓰고, 나를 거부하거나 버리지 않는 곳이었으니까요.


제대 후 부모님이 이사한 새집으로 돌아간 날, 정말 놀랐어요. 바퀴벌레가 계속 나오는 반지하 방.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의 뒷모습을 저는 그때 봤어요.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는 어머니 뒷모습 말이에요. 부모님은 파산했고, 연로해서 재기가 어려웠어요. 학벌, 인맥, 기술, 경험이 하나도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필리핀에서처럼 저만의 동굴로 다시 숨게 됐어요.

그러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가 암에 걸렸어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는데, 젊은 가족 구성원이 있다고 거절됐어요. 제가 일을 해야만 했어요. 요즘 햄버거 가게에서 하루에 10시간씩 일하고 있어요. 근무는 8시간만 하는 건데,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늦게 퇴근해요. 다들 제가 만든 햄버거가 맛있다고 칭찬해줘요. 그런데 누군가가 칭찬을 해줘도 그게 전혀 믿기지 않아요.

여자 친구 얘기를 해볼 게요.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한 사람이었죠.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적이 있는데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어요. 수면제 없이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창피하게 서른넷의 나이에 어머니를 붙잡고 펑펑 울었어요. 그녀는 불우한 환경에서 컸어요.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도 처음 느꼈어요. 하지만 저는 제 앞가림조차 하고 있지를 못하니….

지금 일하는 이유요?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가 크죠. 히키코모리였던 제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지만 사실 저는 잘하고 싶었어요. 링컨이 못된다면 히틀러라도 되고 싶었어요. 아무 일도 안하면서도 속으로는 링컨이 됐다가 히틀러가 됐다가…. 이거 정신병 아니지요?

17년간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단어가 ‘외로움’이었어요. 제 입으로 그 단어를 말해 버리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어요. 올해 처음으로 큰 용기를 내 ‘나는 정말 외로웠다’라는 말을 했어요. 많이 슬펐지만 다행히 죽진 않더군요.

제게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요? 나이도 많고, 가난하고, 기술도 없고, 경력도 없잖아요. 희망을 가져 봐도 될까요? 저는 작은 과일가게라도 열어서 그녀와 함께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부모님에게도 잘하고 싶고, 그녀를 키워준 할머니도 돌봐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가게를 여는 것도 1000만원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하네요. 문득문득 동굴로 다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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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 내용
민성(가명)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외로웠던 시간을 보냈구나를 느꼈어요. 몸과 마음이 아파도 의지할 곳 없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필리핀에 덩그러니 떨어뜨려진 채 8년간 한 번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으니 말이에요. 경제적 여유가 없는데도 무리해서 간 유학 생활에서 민성씨가 절망과 포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던 게 없었던 거죠.


그리워했던 고국에 돌아와 군대를 다녀왔지만 다시 좌절하게 된 것도 이해했어요.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졌고, 학위나 기술도, 인맥이나 경력도 없던 민성씨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말이에요. 민성씨는 다시 자신만의 어두운, 그러나 익숙한 동굴로 들어가 최근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지냈고요.

그렇지만 상황들은 좀 달라요. 필리핀의 8년과 한국의 7년은 절망과 은둔의 시간이라는 점에서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다른 시간이기도 해요. 필리핀의 시간이 외로움과 좌절만의 시간이었다면, 한국의 시간은 좌절과 희망이 함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재 민성씨의 두 개의 고민, 일과 사랑의 고민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거예요. ‘자포자기’예요. 노력해 뭔가를 이뤄내는 것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게 자포자기예요. 어릴 때 연을 날려본 적 있어요? 팽팽한 연줄을 그냥 놓아버린 거예요. 그때 열정과 의지도 함께 사라진 거고요.

저는 최근 민성씨 내면에서 조금씩 진행된 흐름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포자기가 무서운 것은 자기 삶의 ‘주도성’을 상실하는 데 있어요. 얼마 전 일을 시작했다고 했지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것은 죽어버렸던 것으로 생각했던 그 주도성이 다시 살아나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어요.

주도성을 상실한 자기(self)를 끌어낼 수 있는 대상(object)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어요. 딱 하나 예외가 있는데, 바로 자기 자신이에요. 자신의 주도성과 당당히 마주해야 해요. 상담사로서 제가 보기에 민성씨는 주도성을 되찾기 위한 좋은 자원들을 갖고 있어요.

첫 번째 자원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에요. 민성씨는 오랫동안 부모님을 원망했지만 부모님에 대한 깊은 애정 역시 지니고 있어요. 부모님을 지켜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생기자 일을 하기 시작했잖아요.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겼죠. 그녀에 대한 책임감까지 느끼게 되자 삶에 대한 의지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예요. 잿더미만 같던 마음속에 작지만 빨간 불씨가 피어나려는 것 아닐까요?

두 번째 자원은 자기만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예요. 민성씨는 효자가, 멋진 남자가, 자랑스러운 사회인이 되고 싶다고 했죠? 요즘 민성씨는 처음으로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발견했어요. 동료들이 칭찬해 줬고, 민성씨와 같은 팀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죠. 맞아요. 여기는 필리핀이 아니에요. 우리말을 쓰는 고국이에요. 민성씨가 ‘나도 가능할지 모르겠다’라는 것을 느끼게 되자 눌려 있던 삶에 대한 기대감이 새롭게 생긴 거예요. 그 기대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으셔야만 해요.

마지막 세 번째 자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에요. 민성씨는 과묵하지만 조리 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바른 판단력도 갖추고 있고요. 상식도 많아 보여요. 이런 총명한 청년이 17년 동안 방안에만 숨어 지냈다는 사실이 저는 놀라울 뿐이에요. 자신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믿길 바래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 주세요. 자신을 제대로 사랑해야 타인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질문에 답을 할게요. 저는 민성씨가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진로를 찾아 몰두한다면 여전히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생각해요. 손을 놓고 동굴로 돌아가고 싶다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과 싸워내야 해요. 민성씨는 이제 소년이 아니라 어른이에요. 힘들고 외로웠다는 이야기도 핑계로만 받아들여지는 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오늘, 여기서’ 민성씨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봐요. 햄버거를 잘 만들잖아요? 다른 것들도 잘 만들고 싶지 않나요?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스스로를 저버린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외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결국 내가 문제라는 것을 힘들더라도 받아들여야 해요.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가족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 상담 후기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민성씨들이 있다. 사회는 그들을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루저’ 등으로 이름 붙인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됐는지는 묻지 않는다. 두렵다고 하면 약해빠졌다고 얘기하고, 돈이 없다고 하면 게을러터져서 그렇다고 응수한다. 이들의 좌절이 오롯이 이들 자신만의 책임일까? 가난이, 해체된 가족이, 비정한 경쟁 또한 그 원인이지 않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컴컴하고 외로운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있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더 따듯한 관심과 사랑을 품을 수 있길 기대한다.


박상희 소장은
이화여대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위의 사례는 유튜브채널 ‘박상희의 심리스튜디오’에서 진행 중인 무료심리상담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에서 1122일부터 영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