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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들으라" 《새가정》 2015년 4월호

  • 관리자
  •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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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4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4]


“들으라”



 요즘 새로운 버릇이 하나 생겼어요. 욥기를 소리 내어 읽거나, 스마트폰에 제 목소리로 녹음을 해두고 틈나는 대로 듣는 거예요. 눈으로 읽을 때는 시간과 공간이 확보되어야 정독이 가능했는데 녹음을 해두니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면서도 들을 수 있어 좋더군요. 집안일을 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산책하며, 피곤하여 쉴 때 등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욥과 친해질 수 있어 녹음하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제 목소리로 녹음해서인지 더 친근하고 가깝게 들리더군요.       


 그러나 듣는다는 건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제대로 들으려면 말의 내용뿐 아니라 내면의 동기(動機)나 말하는 이의 정서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언어보다는 비언어적 요소에서 훨씬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귀에 들리지 않는 비언어적 요소를 듣기 위해서는 말하는 이의 말투와 어조, 그리고 표정, 몸짓, 자세 등을 관찰하며 들어야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내용에 7%, 말투와 어조에 38%, 표정과 몸짓, 자세에 55%가 담겨져 있다고 하죠. 

 비언어까지 듣는 이런 듣기를 보통 ‘경청’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나 ‘경청’은 이에 더해 이해한 내용을 상대에게 되돌려 피드백해 주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경청’이 되어야 말하는 이는 비로소 공감 받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주로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들로 구성된 욥기의 경우 그들 사이의 경청뿐 아니라 욥기를 읽는 우리의 경청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요.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까지 그들은 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말을 ‘들으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자신들의 말을 전하기에 급급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니 공감 받지 못한 욥은 그들에게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21:2)고 요구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욥뿐 아니라 친구들의 말을 경청하려면 비언어까지 들어야 하는데 욥기에는 그에 대한 묘사가 없으니 우리는 말의 내용만 들어야 하는 한계가 있네요. 

 

 엘리후만은 유일하게 첫 등장에서 욥과 세 친구들에게 감정을 드러내며 나타납니다(32:2~3). 욥에게는 하나님보다 의롭다 했다며, 세 친구에게는 욥에게 변변히 대응하지 못했다며 화를 내고 있어요. 그는 나이가 어리기에 “감히” 의견을 내지 못한 채 조용히 지켜보다가 지혜와 정의에 대한 깨달음은 나이와 상관 없으니 “내 말을 들으라”(32:10)고 당당히 요구합니다. 그동안 기척이 없던 존재였기에 그의 이런 등장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지더군요. 첫 등장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는 그동안 그가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지 느껴지게 하는군요.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의 논박을 들으며 그들의 내면의 동기와 감정을 헤아려 듣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추려놓았던 겁니다. 세 친구가 더 이상 욥에게 논박하지 못하자 답답해진 엘리후는 화를 내며 끼어드는군요. 그 역시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많이 알고 있네요. 막힘없이 흐르는 그의 말 속에는 사람의 선악과 상관없는 하나님(35:6,7), 사람에게 소외돼 홀로 높이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욥의 잘못과 하나님의 정의와 전능에 대해 술술 꿰며 스스로 하나님의 대변인 자리에 가 있습니다(36:2). 


 세 친구뿐 아니라 엘리후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 스스로 완전하고 완벽한 정의와 전능의 신입니다. 그들의 신정론에는 빈 틈이나 열린 틈이 없습니다. 그 신정론에 틈을 내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고자 한 욥은 그러나 엘리후가 계속해서 “이어 말하는” “지혜”와 “정의”에 대해 듣는 자리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경청하지 못한 채 조언하고 충고하는 내 신념은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 친구와 엘리후의 열변은 욥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거죠.  


 욥은 자신을 경청하지 않는 친구들의 논박에 틈을 내어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눈으로도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말로 할 수 없었던 고통을 ‘들으시고’ 찾아와 상대해 주신 겁니다. 이제야 욥은 자신의 의에 대한 항변을 내려놓고 경청하게 됩니다. 그때 욥을 상대해 주신 하나님이 오늘 나를 들으며 상대해 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스치며 전율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묵상 역시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