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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나라면" 《새가정》 2015년 2월호

  • 관리자
  •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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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2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2]

 


“나라면”



 이번 겨울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날까지도 “아버지, 또 올게요” 인사드리면 제 손을 꼭 쥐어주신 터라 다음 날 소천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의 위로가 있었는데, “오래 아프지 않고 가셔서 다행이네. 그만큼 사셨으니 호상이야”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습이든 괜찮으니 살아 계신 아버지가 그립고, 세상에 호상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상대를 위해 해주었던 많은 말들은 대부분 무용지물이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무언가 힘이 될 좋은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갖습니다. 그저 끄덕끄덕 공감만 하고 있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서 빨리 그의 격한 감정과 생각의 물꼬를 옮겨 ‘옳은 길’로 인도해 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여기, 욥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욥이 칠일 밤낮을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어 자신의 밑바닥 감정을 솔직히 토로했을 때, 이제까지 말이 없던 친구들도 일제히 입을 엽니다. 환난은 죄로부터 온 것이니 “나라면” 하나님을 찾아 그분께 내 일을 의탁하겠다(엘리바스), 네 자녀의 죄 때문에 받는 환난이니 하나님을 찾으면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해질” 게다(빌닷), 하나님은 허망한 자를 다 아시니 네가 죄악을 버리면 환난에서 구해질 거다(소발)....... 몸과 정신이 온전할 리 없는 욥을 향해 그들은 하나님과 욥을 다 꿰뚫고 있는 양 청산유수로 충고와 조언을 쏟아놓네요. 욥은 계속되는 친구들의 완고한 논리와 공박에 둘러싸여 더 처절해지며 마음의 상처가 깊어갑니다.   


 이쯤되면 친구들이 욥을 찾아온 애초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아리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욥을 돕고 위로를 주기 위해 달려왔는데 말이죠. 고난 앞에 주저앉은 무력한 욥을 향해 그들은 왜 저리 거세게 공박하는 걸까요. 

 그것은 욥이 토해내는 밑바닥 격정들에 대한 불편감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욥이 쏟는 한숨과 눈물, 격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진 거죠. 그의 감정에 공감하며 쓰다듬어 주기에는  그들의 자아와 이성이 너무 컸던 탓입니다. 어서 빨리 그를 올바르게 돌려놓아야 한다는, 그들 방식의 너무나 ‘옳은 마음’이 고통 중의 사람은 소외시킨 채 하나님을 끌어오게 했던 거죠.  

 이때 욥이 보인 반응은 자기 방어와 분노입니다. 자아는 공격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반응을 하게 됩니다. 상처 입은 자아를 원 상태로 돌려놓으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죠. 친구들의 논리에 욥의 자아가 거세게 방어하고 저항할수록 세 친구는 욥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능만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공박은 더 신랄해지고 욥의 저항은 더 거세지게 되는 거죠. 


 고난과 슬픔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일차적으로 내가 다뤄줘야 할 것은 상대의 감정에 반응하는 나의 감정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불편감과 불안을 해소시키고자 이성이 작동하며 그에게 건넬 ‘좋은 말’들을 생각해 내는 것이니 그 말들은 사실 상대를 위한 말들이 아닌 거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지지와 공감으로 함께 있어 주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위로이고 ‘옳은 길’입니다. 저 역시 아버지의 생명이 소멸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어요. 그때 백 마디 ‘좋은 말’보다 옆에서 함께 손잡고 가주는 한 사람이 절실했고 더 고마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친구들과 욥의 논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논박 가운데 잠잠히 침묵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더듬어 보게 합니다. 만약 욥이 “나라면”, 벼랑 끝에 몰려 위기에 처한 이가 “나라면”,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나라면” 나는 어떤 위로를 받고 싶을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우리 인식 안에 사람을 소외시킨 채 하나님을 말한다는 건 하나님의 대리자 같은 모습으로 교만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내가 고통 중의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모습이라는 걸 욥과 세 친구들의 논박에서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