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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어찌하여" 《새가정》 201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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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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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1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1]

 

 

“어찌하여”




 고통 가운데 칠일 밤낮을 친구들과 함께 땅에 앉아 있던 욥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심장을 찢는 첫 마디입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던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무슨 이유로 나는 세상에 태어나 이 환난을 보고 있는가!” “하나님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어찌하여 죽음이 아닌 생명을 계속 주시는가!” 비탄에 젖은 탄식과 절규가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욥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지 제 눈가도 축축해지네요. 어느날 갑자기,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뿐 아니라 다 키워놓은 자식들까지 한 날 한 시에 모두 잃고 병까지 걸려 처참한 몰골이 된다면, 나는 어떨까요? 숨을 쉬고 살 수나 있을까요? 게다가 세상의 부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생각을 하던 구약시대였으니 욥의 고통은 더 심했겠지요.     

  욥은 눈 뜨고 살아 있는 게 고통스럽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이 두렵기만 합니다. 안식과 평안이 깨진 상태에서 심중의 깊은 파토스를 토해내며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처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치는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어찌하여!”입니다. 내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면 더욱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게 됩니다. 고난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이 화두를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욥의 ‘어찌하여’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어찌하여’가 아닙니다. 

 그는 사탄에게까지 자랑하고 싶었던 여호와의 “내 종”답게 자신에게 온 알 수 없는 고난을 믿음 안에서 확실히 정의 내렸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며,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 역시도 받을 수 있다고 말이죠. 여호와께 온전히 순복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이 ‘어찌하여’는 무엇일까요? 그는 고통으로 절규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묵묵히 조용히 믿음으로 감당하던 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연거푸 찾아온 비극 속에서 욥은 자기 감정을 충분히 느끼며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아내조차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만큼 욥의 고통은 처참했지만 고통과 슬픔의 감정들을 내비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친구들이 찾아온 거죠. 그들은 멀리에서부터 달려와 고난에 처한 욥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칠일 밤낮 동안 함께 슬퍼해 주었습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에게서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고통과 절망에 빠진 ‘지금’ ‘여기’의 자기 존재를  드러내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인간적인 비탄과 절규는 고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고난에 처한 이들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그들과 함께 해주는 ‘시간’입니다. 슬픔과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긴 호흡으로 옆에서 기다려주는 거죠. 시간 속에서 위로를 받으면 슬픔은 스스로 입을 열게 되고, 말하기 시작할 때 치유와 회복이 따라오게 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비록 이후에는 길고도 긴 신학적 논변을 시작하지만 이때까지는 좋은 위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욥은 그들의 위로에 힘입어 입을 열어 자신을 토로하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게 된 거지요. 그러니 고난에 처한 이가 스스로 자기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말하도록 기다려주고 허용해 주는 것, 그것이 중요한 애도과정입니다.    


 살면서 우리 역시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예외 없이 상실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중 지난 4월, 우리 사회는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했습니다.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던 꽃다운 아이들 수백 명이 일시에 떼죽음을 당한 사고가 일어난 거죠.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에 “어찌하여 이런 일이!” “어찌하여 아이들에게!” 전 국민이 경악 속에서 분노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어찌하여!”라는 모두의 절규에 누구도 제대로 대답하거나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죠. 그들 곁에 머물러 충분한 위로와 충분한 말하기를 허용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마음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욥기 안에서 희망을 봅니다. 욥기의 기자는 고난과 시험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욥1:11,12/욥2:5,6).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많은 “어찌하여!”의 고난들은 사람의 거짓과 탐욕의 물신주의가 빚은 악과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시험하며 부메랑처럼 되돌려 고통과 고난을 주기에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한다면 시험과 고통을 주는 악의 요소들이 나와 너,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아 구조악과 내 안의 잘못된 탐욕들을 바로잡아야 할 테죠.

 어쩌면 애도의 겨를도 없이 진상규명을 외치며 길바닥으로 나왔던 세월호 부모들이 우리 사회의 탐욕을 일깨워 구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러하니 여호와께서 아픈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고난을 당하는가!”

 “어찌하여 이 일이 일어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