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남편과 시어머니의 ‘냉대’
■ 이야기
제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지난주에도 저는 시어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고, 시어머니는 저를 투명인간 취급했고, 남편은 이혼하자고 했어요. 무슨 1970년대 신파극 같죠? 저도 참 독해요. 나 싫다고 나가달라는 사람들과 3년째 이런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남편은 소개팅으로 만났어요. 준수한 외모에 유머러스한 사람이었어요.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시아버지가 남긴 재산도 상당했어요. 이런 완벽한 조건의 남자가 제게 적극적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엄마는 제 결혼을 좋아했고 자랑했어요. 주변 어르신들은 “주연(가명)이가 어려서부터 예쁘고 얌전하더니 시집을 이렇게 잘 가는구나” 라고 좋아해줬어요.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시댁에 인사 갔는데 시어머니가 반겨주기는커녕 일마다 꼬투리 잡아 화를 냈어요. 제가 사온 선물은 구석에 처박아 뒀고요. 친정 어른들에 대한 험담도 대놓고 했어요.
서로에 집착하는 남편·시어머니
알고보니 시아버지 자살이 원인
가능하다면 위로해 주는 게 먼저
그래도 안 바뀐다면 연민을 접고
냉정하게 빠져나오는 게 최선
아무리 잘 풀어보려고 해도 안되었어요. 남편에게 물어보면 “니가 예민한 거야” 라며 대화를 회피했어요. 그러다가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남편이 시댁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문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고 있던 시어머니가 남편 엉덩이를 두드리며 “내 새끼는 엄마 꺼지” 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도저히 못참고 대들었어요. “이제 저희가 결혼했으니 제 남편은 제가 챙길게요. 저이를 그만 붙들고 계셔요” 라고요. 시어머니에게 거의 쓰러질 정도로 화를 내고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 날 이후로 남편은 제게 차가와졌어요. 지옥이 시작됐죠. 남편이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림이 그려지세요? 시어머니와 남편은 소파에 앉아 있고 저 혼자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 그 후로 이런 장면이 반복됐어요. 그래도 시어머니는 제게 마음을 열지 않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날 저는 드디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됐어요.
이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요. 시아버지는 남편이 중학교 때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대요.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어머니와 남편이 함께 봤고요. 그 때부터 시어머니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는데, 외아들인 남편에게 몰두하면서 간신히 삶의 끈을 잡으셨대요. 남편은 아버지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엄마까지 우울증으로 떠나 버릴까봐 늘 불안하고 두려웠고요.
남편에게 어릴 때부터 결혼이란 자신을 도와서 엄마를 지켜줄 가족구성원을 찾는 것이었대요. 저와 소개팅을 하고 돌아가 제 SNS를 봤는데, 거기 저희 아빠 발인하는 날 사진이 있었어요. 아빠는 암 투병을 하다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셨어요. 저와 언니가 양쪽에서 친정엄마를 함께 안아드린 사진과 엄마를 위로하며 챙겨드리는 동영상이 있었어요. 남편은 그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이 여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이 여자라면 우리 엄마도 위로해 주겠구나’ 싶었다고요.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니 예상과 너무 다르고, 도리어 시어머니가 더 괴로워하니 자신은 저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상상도 못했던 말을 듣고 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친정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을 수도 없고, 이혼녀가 되기도 싫었어요. 사실 남편이 싫지도 않았어요. 그는 다정하고 유능한 사람이에요, 어머니 문제만 아니면 저와 살고 싶다는 말도 했어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릎을 꿇다가 오는 거밖에 없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절대로 제게 보내주지도, 나눠주지도 않을텐데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 정말 짙은 우울증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 상담
주연씨.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막힌 상황에 처한 주연씨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포기한 듯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제 마음도 아프네요.
주연씨의 문제는 고부갈등이나 부부문제가 맞지만 좀 더 깊은 근원적인 게 보여요. 바로 ‘자살 유가족 문제’예요. 남편과 시어머니는 가장의 자살로 인해 심각한 내상을 입은 자살 유가족이니까요.
가족 중 누군가가 자살을 하면 남은 가족이 입는 타격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이에요. 일종의 내적 화상과 같은 거예요. 남편과 시어머니는 특히 내적 화상이 심했던 것으로 보여요. 예상하지 못했던 40대 젊은 가장의 죽음이었고, 그 죽음의 현장을 두 사람이 같이 봤고, 둘만 남아 살아내야 했어요.
시아버지 죽음 이후 시어머니는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고 했죠? 가족의 자살을 목격하거나, 죽음 직후의 모습을 보았거나, 사건이 일어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는 유가족은 우울증을 넘어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경우가 많아요. 어머니도 극단적 선택을 할까봐 늘 두려왔다는 남편의 말은 사실일 거예요. 자살 유가족은 일반인의 6배 이상으로 자살의 확률이 높다고 해요.
그렇다고 주연씨의 고통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제 말은 현실을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봐야 한다는 거예요. 현재 주연씨의 소극적이고 자포자기한 생활은 주연씨를 위해서나 남편이나 시어머니를 위해서나 전혀 의미가 없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이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남편은 유능한 사람이잖아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어요. 아픔과 두려움에서 야기된 남편의 비정상적인 선택들로 인해 자신도, 아내도, 어머니도 회복이 아닌 더한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해요.
남편은 사건 이후 한 번도 치유의 과정을 겪은 적이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똑똑한 사람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그가 먼저 치유되고 상황을 올바로 인지해야 해요. 더 좋은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알면 바꿀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시어머니를 위로해 드리세요. 반항이나 순종은 소용없을 거고, 그녀가 원하는 것도 아닐 거예요. 쉽지 않겠지만 주연씨가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있다고 시어머니가 조금이나마 느낀다면 자신의 마음의 빗장을 열 수도 있어요. 누구보다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이 부분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두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욱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해요. 그때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게 최선일 수도 있어요. 주연씨가 마냥 희생자가 될 순 없어요. 이 경우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접고, 냉정하게 대처해야겠지요. 때에 따라서는 친정식구나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어요. 자신이 아프다고 죄 없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게 죄라는 사실을 남편과 시어머니가 알아야할 듯해요.
주연씨, 지금은 무릎을 꿇고 있을 때가 아니라 강해져야 하는 시간이에요. 자신의 인생을 타인들의 결정에만 맡기고 있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거예요. 부디 용기를 내길 바랍니다.
■ 후기
대한민국은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붙어 있다. 2003년 이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거의 매년 자살 1위 국가라는 사실을 지켜볼 때 변명의 여지가 없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몇 년 간 매년 자살 사망자는 1만5000명이 넘는다. 자살 사망자 1명에 대해 5~10명의 자살 유가족이 생긴다고 가정할 때 그 규모는 최소 7만 5000명 이상이다. 자살 유가족이 느끼는 슬픔, 후회, 죄책감,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살 유가족 문제를 더 이상 이대로 놓아둬선 안된다. 정부, 시민사회, 당사자 모두가 함께 풀어가는 범사회적 노력과 대처가 요구된다.
이화여대에서 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18년째 소장을 맡고 있다. 2014년 스탠포드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다양한 연구에 참여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사진/기사 출처: 경향신문>
<기사원문>
▶ https://www.khan.co.kr/life/health/article/20220916160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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