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를 떠나서는 잠원동, 염창동, 대신동에서 살아 왔고, 몇 년 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잠시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삶의 이력 때문인지 저는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삶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곤 합니다. 현대 도시 생활은 자유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안겨주는데, 흥미로운 점은 두 감정이 상반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편으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고독해지기를 싫어하는 것이 현대인의 마음 또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근대사회가 시작된 이후 도시 생활을 화폭에 담은 화가는 적지 않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인상파 화가들과 그 후예들은 당시 정치의 중심이자 예술의 중심이던 파리를 즐겨 그렸습니다. 모네와 피사로는 파리의 다양한 모습을 작품으로 남겨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도시 풍경을 그린 것이지 도시인의 생활을 세밀하게 주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시 풍경과 도시인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대표적인 화가로는 미국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호퍼는 잭슨 폴록, 앤디 워홀과 함께 20세기 미국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입니다. 폴록과 워홀은 개성이 강한 화가입니다. 폴록이 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는 등의 ‘액션 페인팅’을 선보인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면, 워홀은 순수미술과 대중미술 간의 경계를 허문, 광고와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팝 아트’의 화가입니다.
‘밤샘하는 사람들’
이들과 비교해 호퍼의 작품들은 고전적이며 소박합니다. 그는 서양 미술의 주요 흐름인 풍경과 인물을 화폭에 담았다는 점에서 고전적입니다. 동시에 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는 점에서 소박합니다. 그가 주로 활동한 20세기 전반 유럽의 회화, 예를 들어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와 비교해볼 때, 이런 호퍼의 고전성과 소박함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렇게 고전적이고 소박했음에도 그의 작품들은 관람객의 시선을 고정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 미술연구소에 있는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1942)은 호퍼의 대표작입니다. 그림 속의 시간은 한밤에서 새벽으로 가는 시점인 듯합니다. 길게 이어진 바를 사이에 두고 종업원과 한 커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뒷모습을 보인 채 혼자 앉아 있습니다.
대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을 담은 이 작품은 화려한 도시 풍경 속에서 도시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림 속의 커플이나 혼자 앉아 있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호퍼는 50여 년 동안 살았던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간이식당에서 이 작품의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만큼 이 그림은 미국적인 대도시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북촌과 서촌을 찾는 사람들
호퍼의 작품들이 보여주듯, 현대 도시는 여러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도시학자들은 현대 도시가 편리함과 익명성을 선물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상품과 서비스를 떠나 살 수 없는데, 도시는 질 좋은 상품과 다양한 서비스라는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게다가 도시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익명성을 안겨줍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다른 이들이 내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면 피곤함을 느낍니다. 도시의 익명성은 피곤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도시의 편리함, 익명성과 도시의 불친절, 외로움은 동전의 앞뒷 면과 같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도시의 변화는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불친절과 외로움을 안겨줍니다. 도시학자들에 따르면, 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거나 그 결과가 낯설 경우 인간은 자연스럽게 무관심 전략을 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무관심 전략은 다른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도시인들 사이의 이런 불친절은 결국 외로움을 낳게 합니다.
이렇듯 편리함과 불친절, 익명성과 외로움은 현대 도시인들이 갖는 이중적인 마음입니다.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에서 제가 발견한 것도 바로 도시인의 정체성입니다. 화려한 불빛 아래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살지만, 정작 마음 밑바닥에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삶에 지쳐 누군가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분주한 도시 생활에선 그럴 마음의 여유도,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내 말을 들어줄 친구도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삭막한 도시 생활은 우리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인간이란 본래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상담학을 공부하는 제가 보기에는 최근 서울에서 북촌과 서촌 같은 오래된 동네가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수유리에 살던 제 어릴 적 경험을 돌아보면, 그때의 서울은 도시이면서도 시골 같기도 했습니다. 아직 아파트가 많이 세워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골목길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지냈습니다. 저와 같이 서울 외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정을 나누면서 때로는 오순도순하게, 때로는 시끌벅적하게 살던 그 시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나오면 만나게 되는 북촌이나 경북궁역에서 나오면 만나게 되는 서촌을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북촌이나 서촌이 보여주는 모습은 조선 시대의 풍경이라기보다는 경제개발 시대의 초기 풍경입니다. 북촌은 최근 많이 변화했지만, 서촌은 여전히 그 시절의 모습을 적잖이 갖고 있습니다. 누상동과 누하동을 산책할 때면, 통인시장을 구경할 때면, 저는 어린 시절 수유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갖게 돼 마음이 편안해지고 약간 기분 좋은 흥분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서촌과 북촌에는 도시의 따뜻함이 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