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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정신건강연구소 상담위원들의 칼럼입니다.

[박상희 소장] 경향신문_욕이라도 실컷 하니 속은 시원하네 [박상희의 구해줘! 내 맘 (9)]

  • 관리자
  •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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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이라도 실컷 하니 속은 시원하네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이야기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르신들에게 큰 위안

욕이라도 실컷 하니 속은 시원하네

<대화>

“내가 올해 여든 셋이야. 심리상담? 누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고. 들어준들 뭐가 바뀌어? 까맣게 탄 내 맘을 누가 알아줘... 근데... 진짜 속이 좀 시원해지나?”

―어르신, 무슨 힘든 일 있으셔요?
“인생 자체가 힘들어. 내가 우리집 영감탱이 때문에 속이 다 뭉개졌어. 영감탱이가 하루에 신문을 두 개나 보고 자빠졌어. 그럴 돈 있으면 우리 손자·손녀 학비나 보태줄 것이지. 평생을 주식이랑 다단계에 빠져서 돈을 다 썼어. 젊었을 때 쥐꼬리 월급을 쪼개고 아껴서 집을 샀는데, 그것도 기어이 대출을 받아서 주식을 샀으니까. 집을 날려버렸어. 그런데 지금 아흔이 다 된 양반이 뭐하는 줄 알아? 약장사를 매일 쫓아 다녀. 집에 안먹는 약이 산더미로 쌓였어. 마지막으로 있던 작은 집도 잃고, 지금은 사글세로 옮겨 왔어. 월세도 우리 딸들이 내줘. 내가 속병이 나서 미칠 거 같아.”

―바깥 어르신께서 다단계에 빠지셨군요.
“내가 젊었을 때 시집살이를 세게 했어. 시어머니·시아버지 다 모시고 수십 년을 살았어. 그 때 마음이 피멍이 들었지. 그래도 내가 우리 시어머니·시아버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내가 요즘은 영감탱이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내 팔자소관이니 누구를 탓하겠어. 젊었을 때도 술 먹고 들어오면 살림살이 막 부수고 그랬지만 그래도 이렇게 밉지는 않았지. 애들 때문에 평생 참고 산거지, 우리 때는 이혼 같은 거는 생각도 못하고 그냥 살았지.”

―정말 애쓰셨네요. 약장수 따라다니시면서 돈을 쓰시는 거 때문에 그렇게 미우신 거예요?
“우리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그렇지! 내가 하나 뿐인 아들을 먼저 보냈어. 건강하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암으로 먼저 보냈어. 내가 마음속에 우리 아들 무덤이 생겨서 아들 말만 해도 눈물이 나. 며느리가 재가하지 않고 간호사를 하면서 아이들 둘을 키우고 있어. 이제 손자·손녀 우리 애기들 대학도 보내야하니 우리 며느리가 얼마나 힘들어. 우리 며느리가 너무 고맙지. 손자·손녀 내 새깽이들 건강하게 잘 크고 행복한 게 내 유일한 소원이야. ‘난 오늘 죽어도 되니까 우리 새깽이들 축복해주세요’ 그게 내 매일 기도지. 딸이 둘인데, 둘 다 잘 살아. 내 사위들이 똑똑해. 딸들이 얼마나 착한지, 우리 사위들도 무척 착하고. 내 자식들은 다들 순하고 예쁘고 착하지. 딸들이 돈을 보내서 엄마도 도와주고 올케도 도와주지. 이런 우리 애들에게 뭐 하나라도 해주고 싶은데 해주긴커녕 약쟁이 따라다니면서 돈만 쓰니까 내가 열불이 나서 이렇게 펄쩍펄쩍 뛰는거지.”

―아휴, 속상하신 거 맞네요. 아들을 먼저 천국에 보내시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다행히 따님, 사위들 모두 정말 좋으신 분들이네요. 어르신께서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시는지도 알겠어요. 어르신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셔요?
“여기 노인회 사람들에게는 내 얘기는 잘 안해. 엄청 시끄러워. 서로 험담하고 시기하고. 책 잡히면 금방 싹 도니까 나는 입 다물고 살아. 그냥 할 일 없으니까 나오는 거지. 다 늙은 노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어? 없어. 그냥 목숨 붙어 있으니까 사는 거고, 여기 나와서 시간 보내는 거지. 그냥 먹는 얘기들 하고, 자식 자랑 하고 별 거 없지 뭐. 번갈아가면서 싸우기들도 해. 어느 이가 아프다고 하다가 오랫동안 얼굴 안보이면,‘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늙은이들 인생은 그냥 이런 거야. 그래도 나는 조금이라도 연금이 나와서 밥은 먹고 사니까 다행이지. 여기서도 돈 없으면 무시당해. 그래도 여기 있는 노인들은 아직 자기 팔다리로 움직이고, 밥도 해먹으니까 다행인 거야. 요양원으로 가야 하면 그건 이미 끝난 거지.”

우리나라가 초고령 사회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외로운 노인들의 삶이 방치되지 않도록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국가사회적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한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리나라가 초고령 사회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외로운 노인들의 삶이 방치되지 않도록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국가사회적 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서 한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몰랐던 사실들도 어르신 덕분에 많이 알게 되었어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는데 아직도 노인복지는 부족한 거 같아요. 오늘 저와 이야기 하시고 좀 어떠셨어요?
“영감탱이 욕이라도 실컷 하니 속은 시원하네. 내가 평생 어디 가서 이런 말을 해 본 적이 없어.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하겠어. 영감한테도 크게 따져본 적도 없어. 그냥 여기서나 큰소리 친 거야. 내 속만 숯검댕이가 되도록 참았지. 홧병인지 우울증인지, 그게 요즘 병이지. 우리 때는 그런 거 있는지도 몰랐어... 상담선생, 내가 심리상담을 또 받아줄 테니까 자주 와. 예전에는 노인회에 좋은 수업이 많았는데, 코로나라 다 중단돼서 더 갑갑하고 쓸쓸해.”

―네, 어르신. 소중한 얘기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꽁꽁 묻어준 이야기를 하면 속이 시원해지시는데 그게 마음 건강에도 몸 건강에도 좋아요. 어르신 이야기 들으면서 저희 엄마도 생각나고, 시머어니도 생각나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어머님들은 늘 자식들 걱정밖에 없는데 자식들도 어머니가 행복하기를 바란답니다. 또 뵐 때까지 건강히 지내셔요.

<제언>

심리상담 분야 중에서 가장 어려운 파트가 청소년 상담과 노인상담이다. 청소년상담은 내담자가 자의성이 약해서, 노인상담은 상담의 일반적 프로세스를 따라가기 어려워서 힘들다. 구체적으로 상담이 ‘해석’과 ‘적용’ 과정까지 가지 못하고 ‘경청’와 ‘공감’ 과정에서 끝나야할 때가 적지 않다. 연세가 많은 내담자일수록 듣기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 한계가 있다 해도 노인 심리상담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감정적으로 덜 힘들고, 번뇌가 가라앉고, 갈등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노인들이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을 했으니 힘든 일이 있더라도 덜 낙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노인이 됐다고 해서 감정이나 정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상실을 경험했기에 더 슬프고, 더 우울하고, 더 두려울 수 있다.

노인자살률이 청년자살률과는 비교 안될 만큼 높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노인자살은 건강과 경제 문제에 더하여 소외, 절망, 우울, 단절, 상실, 무기력 등의 심리적,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다.

널리 알려졌듯, 우리나라는 14년 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얻고 있다. 그 가운데 노인 자살은 압도적인 세계 1위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80세 이상인 노인 10만명당 116.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019년에는 조금 나아져 10만명당 80대 노인 자살률은 67.4명이었지만, 남자 자살률은 133.4명을 기록했다. 부끄럽고 두려운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2026년 이전에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것이라고 한다. 노인의 정신건강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많은 노인 내담자들이 처음에는 심리상담을 쓸 데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삶을 털어 놓는다. 그 내용은 삶의 길이와 깊이만큼이나 간절하고 안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주인공도 그랬다. 노인상담프로그램을 설명하고자 방문했던 노인회에서 한동안 조용히 듣고 있다가 다들 자리를 뜨자 내 옆으로 다가와서 “심리상담? 그게 뭔데? 내 속 얘기 하는 거라고?” 하면서 말을 걸었다. 2시간 가량 이야기하는 내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점점 더 바짝 붙어서 이야기했다. 얼마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건지, 답답한 마음이었는지, 몰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언어적 징표였다.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쏟아놓고 나더니 한결 환한 얼굴이 되어 돌아갔다.

하버드 성인개발연구소의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75년간 724명의 인생을 추적한 연구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가족, 친구, 공동체와의 사회적 연결이 긴밀한 노인들이 더 행복하고,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독은 매우 유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립돼 있는 사람들은 행복감이 더 작을 뿐만 아니라 건강이 더 악화되고, 뇌 기능이 일찍 저하되고, 수명 또한 짧았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노인의 정신건강에는 큰 도움이 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노인들은 더욱 외로워졌다. 어떻게 할 건가. 노인의 정신건강을 자식이나 배우자가 맡기에는 한계가 있다.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정부가 노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돼 주어야 한다. 둘째, 자발적 사회단체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제언은 분리돼 있지 않다. 자발적 사회단체들이 끌고 정부가 밀어줘야 한다. 민간과 공공의 협업체계가 뿌리내리고 강화돼야 한다. 외로운 노인들의 삶을 더 이상 이렇게 방치해선 안된다.



욕이라도 실컷 하니 속은 시원하네

▶박상희 소장은

이화여대에서 목회상담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이화여대 출신 30여 명의 상담학 석·박사들과 함께 전문적 심리상담과 코칭에 주력하는 샤론정신건강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열린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서 발췌했습니다.

<사진/기사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