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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그 집에서 살 때 참 행복했지!" 《새가정》 2021년 9월호

  • 관리자
  • 2021-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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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21년 9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주제: 공간의 힘

 

“그 집에서 살 때 참 행복했지!”



북촌을 어슬렁 걷다가 막다른 골목 끝에서 우연히 오래된 한옥을 만났다. 이제는 박물관처럼 시민들에게 개방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기 한옥이었다. 높다란 계단 위에 굳게 닫힌 솟을대문의 위용이 만만치 않던 그 집은 안으로 들어가려면 한 계단씩 오르며 저절로 우러를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솟을대문을 열자 좌우로 늘어선 행랑채가 이 댁의 그 옛날 사회적 신분과 살림살이 규모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대문 전면에서 집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는 사랑채는 바깥주인의 사무공간으로, 방문을 걷어 올리고 바깥문을 열면 방과 마루와 정원이 시원스레 하나로 연결되어 연회 등 각종 사회적 활동이 가능해지는 개방형 구조였다. 사랑채와 복도로 연결된 안채는 안뜰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이 막힌 ㅁ자형으로, 여성 3대(할머니, 안주인, 며느리)가 함께 기거했다 한다. 

이 집을 돌아보며 ‘공간은 권력을 만들어낸다’는 어느 건축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나 역시 이 집을 돌아보며 그 옛날 이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역학관계와 그에 얽힌 심리들이 느껴졌다. 안과 밖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사랑채와 폐쇄적인 사적 공간인 안채와 별채, 그리고 문간 양 옆의 행랑채로 나눠진 이 집에는 신분과 세대, 성(性) 별 사이에 존재했던 질서와 욕망, 그리고 권력이 또렷이 구획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 가문, 한 가족의 시대적, 문화적 정체성을 집을 통해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날의 집은 어떨까?  아파트식 생활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사랑채, 안채, 별채 대신 안방, 작은방, 거실 등 방으로 구분 지어져 집안의 중심자가 안방을 쓸 터이다. 각 방 쓰는 부부들도 있고, 아이들에게 안방을 내준 집들도 많다. 우스갯소리로 안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있는지 보면 그 집의 권력자, 중심자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권력자는 심리적으로 통제와 감시의 욕망을 갖는다. 가족의 동향을 지켜보려면 집 안의 중심에 위치한 거실 가운데가 제격일 것이다. 안방을 통해 물리적인 우위를 점한 후 가족의 활동을 지켜볼 수 있는 중심 공간을 자신의 자리로 차지했다면 가족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무의식적 감시, 통제가 가능해진다. 모두를 볼 수 있는 곳, 유형, 무형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그곳에서 권력이 나오는 것이다. 반려동물 전문가들도 기르는 개가 거실 소파 위를 자기 자리로 정하도록 두지 말하고 한다. 그 자리가 자기 자리가 되면 개는 높은 곳에 앉아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자신이 집 주인인 양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점유한 공간보다 높은 자리, 탁 트여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중심 위치는 무의식적으로 감시와 통제가 용이해지기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자가 차지하게 마련이다. 만약 우리 집안의 질서가 마음에 안 든다면 공간과 자리를 재배치해보길 권한다. 우리는 공간에 동화하는 심리를 갖고 있기에 공간 재배치만으로도 전체 질서가 바뀌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깐깐한 시어머니가 드디어 안방에서 물러나 아랫방으로 옮겨가면 이제 그 집 안살림은 안방의 새 주인이 된 며느리를 중심으로 금세 질서가 재편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전에 비해 155% 정도 증가했다고 한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냈던 사람들이 이제는 일도, 공부도, 쇼핑도, 운동도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며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또 다르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족 모두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24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기에 기능적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함께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가족 간에 자기 표현과 소통이 원활하다면 24시간 함께 있어도 집이 크던 작던 서로 배려하며 편안한 곳이 되겠지만, 불화와 불안이 혼재된 가족이라면 공간의 크기와 관계없이 같이 있다는 자체로 편치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이 오히려 다른 어디보다 불안하고 불편한 스트레스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집이란 무형의 마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고 쉴 수 있게 해주어야 진정한 집이 된다는 의미이리라.    


만약 지금 우리집이 안락하고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집을 떠올려보자. 어린 시절의 집은 우리에게 가장 원초적인 장소다. 외형의 모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안전한 울타리이자 추억의 뿌리이며, 내 정체성의 일부를 만들어준 곳이다. 냄새, 소리, 색깔, 촉각의 시초가 그 집에서 이루어졌기에 어린 시절만큼 그때의 집도 중요하다. 

“그 집에서 살 때 참 행복했지!” “거기서 무지 재미있었어!” “그 곳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라는 감정이 올라온다면, 그건 모든 추억에는 장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았던 싫었던 그때 느꼈던 감정과 느낌들이 그것을 느꼈던 공간과 함께 내 안에 자리매김되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내 안에서 어떤 정서가 올라오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떨쳐내고 싶은 느낌과 생각들이 있다면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 고요히 내 안을 바라보자.  

그래서 편안하고 안정된 집을 꾸미고 싶다면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유형, 무형의 집은 어떤 집인지, 집에 대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사실 지금 우리집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린 시절 내가 집에서 경험했던 정서들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것에 끌리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 정서와 욕구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집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정서가 불안하고 불만족하다면 그만큼 집안 분위기와 가구 배치, 소품 연결, 실내 색상과 물건 정리 등에서도 왠지 모를 불안과 불편감이 느껴진다. 심리가 밖으로 표출된 결과다. 집을 보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이다. 


집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닮게 되고 사람은 또 그 집에 맞춰 변화하게 되기에 우리에게 집은 그저 외형만의 의미가 아니다. 북촌 막다른 골목에서 만났던 한옥, 그 ‘백인제 가옥’의 솟을대문이 열릴 때 단지 대문만이 아니라 그 집의 서사와 백인제라는 사람과 그 안에 함께 살던 이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열렸던 것처럼 우리의 집도 문이 열릴 때 나뿐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와 서사가 함께 열린다는 것을 알아채자. 집이란 결국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집’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곳, 그래서 안식을 얻고 치유가 일어나며 창의적이 되도록 북돋아 주는 곳, 이 곳이 모두에게 각자 ‘우리집’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