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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어찌하여" 《새가정》 2015년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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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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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12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12]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어느새 ‘새가정’과 함께 일 년이라는 시간을 걸어왔어요. 이제 올해의 마지막 시간 앞으로 오고 보니 아쉽기도 섭섭하기도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한, 점점이 깨알 같은 감정들이 마음 안에서 문을 여네요. 우리 모두 시간 속으로 들어가 되짚어보면 기억나는 시간들은 감정과 얽혀 있는 시간들이죠. 그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새가정’에 1월호 원고를 넘기던 시간입니다. 그날은 첫 눈이 존재를 과시하며 하늘과 땅을 하얗게 밝히던 날이었고, 아버지의 숨이 인공호흡기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때였죠. 오늘을 넘기기 어려워진 아버지는 하얀 침대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계시는데 창밖으로는 흰 눈이 펄펄 날리던 그 막막하던 허공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세상이 한순간 다 멈춰버린 것 같고, 세상이 한순간 다 사라져버린 것 같던 그 텅 빈 느낌은 지금도 온몸의 감각 마디마다 생생히 새겨져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 속에서 스마트폰에 저장해 온 원고를 ‘새가정’에 보낸 지 몇 시간 뒤, 아버지는 극심했던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여든일곱 해의 삶을 거두고 평안히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욥과 함께 일 년을 걸어온 12번의 발짝 가운데 그렇게 첫 발짝을 뗐습니다. 발짝을 뗄 때마다 세상과 나와 타인에 대해 더 민감해지던 감정들과 함께 이제 묵상의 끝맺음 앞에 섰습니다. 


욥 이야기는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기24:17)로 끝을 맺습니다. 전 세계 전래동화나 고전의 많은 이야기들은 주인공의 죽음을 알리며 끝을 맺기보다 다음 장을 열면 무언가 이야기가 더 전개될 것 같은 흥미진진한 기대나 여운을 주며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욥 이야기는 주인공의 죽음을 알리는 마지막 문장으로 깔끔하게 완결되는데, 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가 저에게는 이상하게도 위안과 안심을 주더군요. 


욥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도, 천시하고 조롱하는 가장 낮은 자리에도 처했던 사람이 욥입니다. 존재의 극심한 부침 속에서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죽기를 청하기도 했죠. 어떤 이에게는 하루하루가 시간이 멈춘 깜깜한 동굴 같아서 이미 겪고 있는 고통에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주는 고통까지 가중되어 삶이 너무 무거워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욥 역시 한때 그랬습니다. 그러나 죽기를 청하던 극심한 고통의 절규들을 견뎌내고 회복되어 “나이가 차서” 죽었다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 말이 또 얼마나 아름답게 가슴에 와 닿던지요. 극심한 고통 속으로 죽음을 떠올렸다는 건 실은 삶의 본능 역시 그만큼 강렬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죠. 죽겠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고, 자살자는 자살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구조를 바라는 단서를 반드시 흘리죠.     

 그러니 욥의 이야기는 하나님마저 인정한 대단한 신앙을 가진 흠 없는 한 사나이가 뜻 없이 당한 고난을 견뎌 하나님께 회복 받은 이야기, 죄와 벌의 인과응보론을 깨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 준 이야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나 다양하게 생각해볼 여러 이야깃거리들이 무궁하게 숨겨진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욥처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욥기1:8)다고 하셨으니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욥에게서 한참 뒤떨어진 우리에게 욥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먼 나라 옛날이야기로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욥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 보니 세상의 눈으로는 시시하고 찌질한 인생이라고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가장 낮고 천한 곳, 말구유로 내려오셨잖아요.  

저 위에서 세상을 물로, 불로 심판하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스스로 겸손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고 가신 예수님. 그러하니 가난이나 병이나 사회적 약자로 비인간적 삶에 처한 연약한 이들이나 별 거 없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해 주심은 당연한 것일 테죠. 죄와 벌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던 욥에게 ‘그냥’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행위의 어떠함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고 이미 말씀하고 계셨으니까요. 그런 하나님을 체험한 욥은 의를 주장하던 자신의 무지했던 말들을 모두 거둬들이게 되었던 거죠. 욥처럼 귀로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뵙게 될 수 있는 영적인 민감성과 감수성을 계속 길러가야겠습니다.  

 

‘지금 여기’ 영원하지 않은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들은 물리적 시간보다 훨씬 더 짧다는 걸 기억력의 한계와 함께 매순간 느낍니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신 이도,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지금 여기’에서 겸손히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저 역시 잊지 않겠습니다. 

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욥기 묵상의 첫 발짝을 떼어 욥의 죽음으로 마지막 발짝을 딛었습니다. 성서 속 욥은 나이가 차서 죽었지만 성서 밖 욥은 제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욥과 함께 제 심중에 새겨진 창조와 사랑의 하나님. 저에게는 잊지 못할 또렷한 그림들입니다. 죽은 그림이 아니라 풀어놓아 움직여 돌아다니게 하는 생령 있는 존재로, 나와 타인을 소중히 생각하고 돌보는 자가 되겠습니다. 


한 해 많이 부족했던 글들 읽어주시며 무언으로, 편지로 마음을 전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모두에게 임할 예수님의 평안을 기도하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