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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하나님을 향하여" 《새가정》 2015년 10월호

  • 관리자
  •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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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10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10]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 전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주목시켰습니다. 빨간 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은 작은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는 사진이었어요. 한눈에 봐도 작고 여린 아이의 무력한 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사람들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습니다. 그 작은 아이는 세 살배기 아일린 쿠르디로, 내전과 IS의 학살을 피해 가족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그리스로 밀입국하려던 시리아 난민이었죠. 평화의 땅에서 새 삶을 꿈꾸던 쿠르디 가족은 보트가 높은 파도에 휩쓸리며 젊은 아빠만 남겨둔 채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아빠 압둘라는 가족의 시신과 함께 공포의 땅, 시리아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갑작스레 모든 것을 잃은 욥은 재 가운데 앉아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욥16:20)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분께 가야 진정한 위로를 얻고, 이해할 수 없는 이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그러나 그의 심정은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욥7:15)하겠다고 말할 만큼 아팠습니다. 그러니 한날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겨진 압둘라의 슬픔 역시 그에 못지않을 테지요. 


오늘날 이 땅에는 ‘또 다른’ 무죄한 욥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삶이 통째로 깨지는 그들의 절박함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런지요. 이 땅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고한 고난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까요?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까닭 없이 무고한 이들의 슬픔과 고통 속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마땅한 모습일 테죠.   


만약 내가 공포의 땅 시리아에서 태어난 아일린이라면, 만약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한날에 모두 잃어버린 시리아 땅의 압둘라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약 내가 홀로코스트의 유대인이었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어린 자식에게 빈 젖을 물려야 하는 아프리카의 어미였다면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와 여유가 정말 당연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니 까닭 없이,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진 것들이네요. 그러니 굶주림과 전쟁과 공포의 땅에 태어났기에 출생과 함께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난민들의 고통은 무고한 고난인 거죠.  


그렇기에 어린 아일린의 죽음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일으키며 우리의 책임을 일깨워 주었고, 난민들을 향해 더 많은 구조의 손길을 보내는 데 힘을 보태게 했습니다. 그것은 뜻 없이 파괴되는 생명에 대한 각성이고 불의에 대한 분별력에서 온 것이지요. 그러나 무사히 그 땅을 탈출해 평화의 땅에 정착했다 하더라도 지금 난민들이 겪고 있는 슬픔과 불안, 분노는 삶 자체가 조각난 데서 오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의 고통입니다. 그들의 집단적 트라우마가 앞으로 인류의 삶에 어떤 고통을 가져다 줄지, 인류의 시각을 어떻게 물들여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근원적인 치유, 영적인 회복이 일어날 수 없다면 말이죠. 망가진 영혼이 어떻게 그 주변까지 함께 망가뜨리는지 우리는 무수히 목격해 왔습니다. 고통스러운 무의식적 감정들을 내 안이 아닌 바깥에서 처리하고자 하기 때문이죠. 모든 개인적, 집단적 트라우마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삶과 영혼의 회복을 위해 공동체가 함께 애써야 할 이유입니다. 그것이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되겠지요.


종교의 유무와 종류, 인종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생명입니다. 내 생명, 기독교인들의 생명만 하나님이 만드셨고 주관하시는 분은 아니죠. 욥을 만나주신 하나님이 욥을 통해 나는 너희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라는 걸 보여주셨듯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욥처럼 찢긴 가슴으로 재 가운데 앉아 있는 연약한 자들의 아픔을 보며 뜨거운 눈물로 그들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자신이 지은 생명들을 향해 거듭거듭 “보시기에 좋았”(창1:10,12,18,21,25,31)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니 위로가 필요한, 자신에게 온 이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알고자 하는 압둘라 같은 이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체로 대해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인과응보라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금을 깨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서 치유 받은 욥처럼 그에게도 우리의 편견과 편협을 뚫고 그렇게 임해주실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슬픔은 언젠가는 그치고 하나님께 자신의 슬픔을 맡긴 자들의 영혼은 더 깊게 자라게 될 테죠. 치유된 슬픔은, 회복된 영혼은 공동체를 치유하고 세우는데 귀한 자원으로 부름 받게 될 거구요.  

그렇기에 지난 호를 읽고 다시 편지를 보내주신 통영의 최 선생님께도 하나님 안에서 슬픔이 그치는 날이 올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 부름 받을 날이 올 것이라 말씀드립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소망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계시기에 놀라운 은총이 우리의 의식을 넘어 당도하게 될 거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욥 16:20, 21)를 간절히 원했던 욥처럼 우리의 중재자,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향해 저 역시 간절히 기도합니다. 공포와 불의, 전쟁으로 다스려지는 그 땅과 아직 재 가운데 앉아 있는 세상 모든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들을 위로해 주시길, 중재해 주시기를.... 온 우주에 편만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의로운 통치하심, 그리고 생명을 생령으로 다스려주시는 하나님, 아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나 이 세상은 당신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