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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주의하여 보았느냐" 《새가정》 2015년 9월호

  • 관리자
  • 201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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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9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9]


“주의하여 보았느냐”



 욥에 대해 쓴 저의 묵상편지글을 읽은 독자로부터 얼마 전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욥처럼 예기치 못한 때 들이닥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은 어떻게 해야 회복될 수 있을지 물어왔습니다. 그분의 긴 편지글은 아직도 가슴 먹먹하게 하며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 편지를 실마리로 오늘의 묵상의 올을 풀며 욥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미 욥에 대해 ‘잘 알고 계신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욥에 대해 얼마나 자신만만하신지 사탄에게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며 “그와 같이 (......)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욥1:8)다고 자랑까지 하시네요. 사탄이 거는 내기에도 순순히 응하실 만큼 욥을 편들고 계시죠. 그러니 이미 욥의 어떠함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의 전지성으로 인해 욥의 이야기는 싱겁게 끝날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사탄과 하나님이 물러난 무대에 욥의 세 친구가 등장하며 이야기는 색다르게 전개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무죄함을 보증하신 욥이건만 세 친구들 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한숨과 토로들은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합니다. 욥은 단 한 명도 내 편이 없는 상황에서 어디에도 안 보이는 하나님을 찾으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고립무원의 소외당한 인간이 되어 있는 거죠.  


 가난과 병과 소외의 고통에 처하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게 될까요? 어느날 갑자기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며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고난과 고통을 꿋꿋이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지탱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누구신가요? 이 질문은 욥의 이야기가 제게 던진 질문이자 삶의 질곡에서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물음들입니다. 그래야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가?”에 대한 사탄의 의혹 제기와 세 친구의 인과응보론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될 테죠.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 질문들로 인해 욥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생생히 주목시키고 있습니다. 


 욥과 논쟁을 벌이는 세 친구들은 아무런 외상을 갖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지금 욥은 내면과 외면이 모두 극심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외상의 고통에 처하게 되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격을 나타내게 됩니다. 인내, 친절, 겸손, 수용, 평화 보다는 불안, 분노, 두려움, 소외, 좌절의 혼돈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게 되죠. 그런 혼돈의 고통 속에서 욥은 세 친구들과 논쟁을 벌여야 해요. 불공정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이야기하는 세 친구들을 보며 나를 포함해 인간이 가진 자기 중심성의 아이러니함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이때 “주의하여 보았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물음입니다. 그러니 욥의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들은 나를 비워 치열하게 하나님을 향해야 그 의미와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알게 합니다.        

 

 그러나 욥 역시 타인들 눈과 세상 신념의 감옥에 갇힌, 그 벽에 가두어진, 한계를 가진 사람

이죠. 죄에 대해 불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자녀들이 혹시라도 죄를 지었을까 자녀들의 잔

치 뒤에는 번제를 드리며 가장으로서 가족 모두의 흠결 없는 삶을 추구했습니다. 죄와 벌의 

이분법적 구조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 그의 항변 역시 자신의 무죄함에 맞춰져 하

나님을 향해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욥31:6) 요구했던 거

죠. 그럼에도 욥의 훌륭함이라면 오늘 나에게 온 고난은 부와 명예의 회복이나 병 씻김이 아

닌, 영적인 문제를 해결했을 때 해방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육신의 고

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온 것인지 하나님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드디어 하나님

을 만났습니다.    


 이제껏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불안과 두려움이 내재된 죄와 벌, 인과응보론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뚫고 등장하셔서 당신의 통치방식을 생생히 보여주십니다. 단번에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당신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셨어요. 그동안 침묵 속에서 욥을 보고 계신 하나님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욥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욥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고전13:12)이라고 한 성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 욥은 그동안의 주장을 거두고 회개할 뿐입니다. 영적 진보 속에서 그동안의 모든 문제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세상의 인식과 그 위에 덮여진 목소리를 걷어내고 자신의 껍질 안에 든 생명의 본질, 그 중심에 그물을 내렸을 때 우리가 건져내게 되는 것은 이미 나를 잘 알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함입니다. 그 어떤 사악한 존재가 건드릴지라도 결코 훼방할 수 없는 그분과 나 사이의 관계입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신 통영에 계신 최선생님, 선생님을 가둔 세상의 금이 너무나 가혹하고 고통스럽지만 나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 마음과 상황을 주의하여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고난에서 해방 될 날이 올 것임을 욥은 선포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날은 “이미” 선생님 곁에 와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영혼의 밤과 해방의 새벽, 영적 진보를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