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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옳지 못하다" 《새가정》 2015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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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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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7,8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7,8]


“옳지 못하다”



 얼마 전, 어떤 교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메르스가 우리나라에 왜 이렇게 많이 퍼지는 줄 알아? 이게 다 동성애축제를 막아주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야. 메르스에 걸려 돌아가신 분이나 감염된 사람들은 안됐지만,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야.” 순간 머릿속이 띵해졌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희생양’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을 쿵, 울리며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분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압니다. 죄와 벌과 하나님의 뜻... 때때로 자신감 있게 말해지는 이런 기독교적 단어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옷깃을 여미게 하네요. 종교성이나 경건을 가장한 도식적이고 율법주의적 사고들, 근본주의적 신앙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어느 한 켠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네요. 2004년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은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2010년 일본 대지진 때는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하던 목회자들이 떠오릅니다. 


 욥의 이야기 역시 죄와 벌에서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야기가 대단한 것은, 인간의 죄와 고난, 하나님의 벌이라는 뿌리 깊은 기계적인 인과를 깨고 영적 진보를 이뤘다는 거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죄와 벌은 인간의 원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은 인간은 이 세상에서 수고와 고통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였습니다. 욥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역시 죄와 벌의 인과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식을 보면 인간은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고”(욥4:7),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욥34:11) 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욥의 파국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느냐”(욥1:9)고 한 사탄에 의해 시작됨으로 죄 없이도 인간은 망할 수 있다는 걸 전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욥의 이야기는 죄와 벌 안에 갇혀 있던 당시의 단선적 세계관에 균열을 내고 이데올로기적 신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한 사건인 거죠. 어쩌면 욥의 고난, 욥의 파국을 통해 오히려 당시 사람들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하나님이 그 틀에서 해방되신 더 큰 사건이었는지 모릅니다. 

 

 욥의 시대를 한참 건너온 요즘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처벌하고 보복하신다는 고대 종교적 인식 단계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가 죄와 벌이라는 이분법적 의식, 흑백논리에 젖게 되면 하나님은 처벌하고 보복하고 자연재해를 통해 벌주시는 ‘평면적’ 존재가 돼 버리죠. 사회적으로 큰 일이 생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목회자들이 있어 논란을 몰고 오는 걸 보면 아직도 어느 한 쪽에서는 여전히 이런 사고가 유효한가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를 말하지만 두려움과 불안, 죄책감으로 인해 욥의 세 친구들처럼 학습된 하나님 그 이상을 만나러 자신들이 그어놓은 금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나’와 ‘나쁜 나’가 동시에 내 안에 있는데, 건강한 나란 그 둘이 통합된 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선택하는 건 ‘좋은 나’는 취하고 ‘나쁜 나’는 타인에게 돌려 투사하는 겁니다. 나는 나쁘다는 죄의식,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무의식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거죠. 개인뿐 아니라 어느 한 사회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비난과 증오를 투사하기 위해 타깃이 될 사람을 찾는 것 역시 개인과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입니다.   

 고난 속의 욥 역시 세 친구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 공동체로부터 죄인이라 낙인찍혀 따돌림 당하고 거칠게 다뤄졌습니다. 망한다는 건 당연히 죄의 결과이고, 하나님은 죄인을 처벌하신다는, 그들 자신의 신념 안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은 욥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이데올로기를 벗고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을 주장하던 세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욥42:7)라는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나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책망 받을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느낍니다. 기독교는 언제부터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근심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등 돌리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세상의 악함이 하나님의 진리를 싫어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어둡게 가리는 게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욥이 만났던 하나님처럼 그분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거라 믿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는 영적인 민감성을 회복해 자신이 마땅히 느껴야 할 영적인 죄책감 대신 희생양을 찾아 투사하고 비난하고 처벌하고 싶은 마음을 멈춰야 합니다. 대신 끌어안고 나누고 용서하고 속죄하는 성숙한 지혜로 성장해 가야 할 테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확고히 아는 체 하기보다  ‘모른다’고 열어둔 채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을 확장해 가는 게 더 옳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