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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가서" 《새가정》 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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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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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6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6]


“가서”




 얼마 전에 우연히 용서를 주제로 한 영화 한 편을 보게 되었어요. 몇 년 전에 개봉했던 이정향 감독의 [오늘]이라는 영화입니다. 뺑소니 오토바이 사고로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범죄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이야기예요. 피해자, 피해자 가족, 가해자, 가해자 부모, 경찰관, 종교인 등 용서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용서가 무엇인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이끌어주더군요. 


 그 영화를 보며 욥의 용서가 떠올랐습니다. 욥의 아내와 친지와 친구와 주변 사람들은 그가 가장 고통스런 환경에서 죽음을 청할 만큼 괴로워 할 때 그를 떠났고, 무시했고, 업신여기며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19:2~22, 30:1,9), 세 친구들은 무죄와 고통을 호소하는 그에게 그만 입 다물고 회개하라고 다그쳤죠. 이때 욥의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친구들을 향한 억울함과 분노의 항변,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애끓는 호소입니다. 욥은 사방 적에게 둘러싸여 찢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걸치고 그분을 바라봅니다.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는 거죠.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섰고 은밀한 죄악조차 짓지 않은(31:5~34) 자신을 박대하고 학대한 그들을 욥은 하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대했나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용서에 대해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과 용서를 해야 하는 주체자 사이에는 간극이 있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눅6:27),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22),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는 말씀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그 계명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혹은 거짓으로 용서해 버리거나 피해자에게 용서해 주라고 강요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오늘] 영화에서도 종교인들로부터 용서를 강요받는 피해자, 가해자의 반성이나 사과가 없는데도 성급히 용서해 주는 피해자, 기독교 계율에 눌려 쉽게 거짓으로 용서하는 피해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 뒤에 겪어야 하는 그들의 심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용서와 인간이 해석한 용서 사이에 빠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끼리의 화목인 용서는 심리학적으로 상처가 치유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하나의 긴 과정입니다. 그만큼 나에게 고통을 준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건 심리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죠. 그러나 우리는 마치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상처를 입어도 믿음의 능력으로 단숨에 치유하고, 가해자에 대한 미움도 단숨에 넘어가야 하는 하나의 사건처럼 생각하기 쉬워요. 사람의 몸이나 심리구조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죠. 여기서 간극이 생기는 겁니다. 그 간극에서 생기는 여러 심리적, 병리적 현상들은 온전히 피해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기에 용서는 신중히, 조심히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용서의 주체, 용서의 권리는 온전히 피해자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피해자 편에서 용서를 진행할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권리가 지금 여기서 보장되어야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에서 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다혜와 가정폭력 피해자 지민이, [밀양]에서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은 신애까지 그들은 용서의 주체와 권리를 자신들이 갖지 못했어요. 주변에 휘둘리며 성급히, 거짓으로 용서함으로 마음이 더욱 아프고 상처가 더 깊어지게 되었죠. 그런 면에서 욥기 42장은 저에게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빌어야 할 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지목해 주셨습니다. 욥의 친구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42:7)하다고 지적해 주심으로 그들의 잘못을 건드려 반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42:8)고 행할 바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용서보다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먼저라고 알려주시네요. 그러니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하~ 역시 하나님이시다! 하는 감동과 감격에 빠지게 되었어요. 

 

 이제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들고 다시 욥을 찾아온 세 친구를 바라보는 욥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거봐, 내가 옳았지?’ 하는 우월감이나 ‘너희 같은 무지한 비판가들은 더 보고 싶지 않아’ 하는 단절감, 혹은 ‘그래, 하나님이 원하시니 봐준다’ 하는 교만함이 들 수도 있을 텐데 욥은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중보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중보를 당연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느꼈습니다.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너는 형제와 화목해라, 그러기 위해서는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셨죠. 아무 말 없이 용서에 대한, 중보에 대한 주체와 권리를 완전히 욥에게 맡겨주셨고, 그래서 욥의 주체적 용서와 진심의 중보에 기뻐하셨던 거겠죠. 

  욥의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의 중보를 보게 됩니다. 무고하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무지함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하셨듯이 무고했던 욥 역시 친구들을 위하여 중보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무고한 자들에게도 고난이 온다는 것을, 그들의 고난은 우리의 허물을 대신한 중보라는 것을, 고난 받는 이들 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위로라는 것을, 잘못을 하면 상대에게 ‘가서’ 직접 용서를 구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물리적 삶의 자리는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심리적, 영적 삶의 자리는 이제 자유롭고 평안해진 욥. 이것이 고난이 궁극으로 우리에게 줄 신비이고 구원일 테죠. 우리 역시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을 향해 묻고 따지고 덤빌지라도 그분 안에 있음으로 받게 될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