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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미 상담위원] "다 와서" 《새가정》 2015년 5월호

  • 관리자
  • 201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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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가정생활협회 월간지 《새가정》 2015년 5월호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박현미 상담위원

 


 

[평신도가 띄우는 묵상편지/욥기 5]


“다 와서”




 단절만큼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는 고통 대신 죽음을 선택한 로미오와 줄리엣들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가장 끔찍하게 일어나는 사건이나 고통스런 감정들은 대부분 가족간, 연인간의 애착, 사랑과 관련되어 있지요. 저마다 따뜻한 연결을 원하고 있지만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가정폭력과 치정살인과 이혼, 고독사와 자살과 일인가구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심리적 단절, 고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중요한 사람과의 애착 사이에서 경험하게 되는 고통은 그 어떤 것보다 아프고 회복이 더딥니다.         


 욥의 고난 역시 단절로 시작됩니다. 하인들이 연속적으로 달려와 재산이 몽땅 사라졌다는 소식 앞에서는 기척 없던 욥이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1:20)합니다. 이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여호와”(1:21)이시니 차분하고 담담했을까요? 

 욥이 갑자기 이해할 수 없게 겪어야 했던 이런 재난을 우리는 트라우마(외상)라고 하죠. 트라우마란 심각한 죽음이나 상해를 입을 위험을 실제 겪었거나 그러한 위협에 직면했을 때, 혹은 타인이 죽음이나 상해의 위험에 놓이는 사건을 목격했을 때, 이에 대하여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트라우마는 사람 사이에 깊은 고립과 정서적 단절을 가져옵니다. 자식과의 이해할 수 없는 단절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병까지 얻은 욥은 단박에 죄인이 되어 이제껏 친밀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수치와 공박을 당합니다. 무죄함을 주장하며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지만 그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쌌던 모든 것들이 한날 한시에 사라지며 세상과의 고립 속에 홀로 놓인 욥.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가나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매우 취약한 상태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세상은 안전하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고, 세상 질서는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정의로  움직인다는, 욥이 세상에 대해 가졌던 전제들은 트라우마 경험으로 일거에 깨졌습니다. 정서적 단절상태에서 세상 사람들이 입을 모아 “너에게 온 고난은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는 다그침 속에서 억울함과 무력감과 싸우며 자신을 변호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처럼 트라우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공동체 사이의 연결을 끊고 신뢰를 위태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죠. 욥 역시 그토록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했던 것은 신정론의 틀 안에서 자기 존재를 내침 받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그도 사람과 하나님과의 연결을 절박하게 원했습니다. 


 트라우마는 주변 사람들과 공동체의 반응이 그의 심리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회복과 악화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죠. 욥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됨으로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후의 길고도 긴 논변(32장~37장) 뒤에 욥 앞에 나타나셨죠.   

 뜬금없이 당신이 지으신 세상 천지 생명들을 보여주시네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상은 도저히 머리로는 대답할 수 없는 은총으로 움직여지는 신비로운 세상입니다. 신정론으로 복과 벌을 받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세상’이 아니라 은총으로 살고 있는 ‘온 천지 생명과 하나님 사이의 세상’을 보게 합니다. 행함이 아니라 존재로 인정받는 이 놀랍고 새로운 지평을 깨닫게 된 욥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들을 거둬들이고 회개할 뿐입니다. 욥이 세상을 다시 만나는 그 눈을 통해 제 눈도 같이 열리네요. 감탄과 경외가 함께하는 가슴 떨림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연약한 자들과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저절로 눈물이 쏟아지네요.    

     

 이제 욥에게 일어난 다음 일은 사람 사이의 관계 회복입니다. 무엇보다 욥의 “모든 형제 자매와 이전에 알던 모든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42:11)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욥은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시작해 사람들이 “다 와서” 그와 함께 해주는 진실한 슬픔과 위로를 통해 완전히 회복된 거죠. 하나님의 정의는 결국 죄와 벌이 아니라 사랑임을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시네요. 

 그렇기에 가족과 이웃과 공동체와 의미 있게 연결됨으로 우리의 깨어진 부분들이 이어지고 메워지게 된다는 걸 배웁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게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세월호 생존자와 유가족들과 어떻게 함께하시며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게 해주시네요. 봄빛 찬란한 5월,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고 기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