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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소장] 명화로 읽는 심리이야기 ::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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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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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예화입니다. 방탕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흥청망청 다 탕진하고 난 후 거지가 되어 돌아와 용서를 구한다는 이야기지요.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화가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in)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돌아온 탕자입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의 장면은 탕자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달려 나와 끌어안는 장면이지요.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오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누가복음 15장 19-24절)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병들고 가난한 노년의 화가였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렘브란트의 유작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야경등 렘브란트 특유의 뛰어난 그림들과 그가 네델란드의 국보급 화가라는 사실만 기억하지만, 그의 삶이 참으로 고달팠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아 일찍이 부와 명성을 소유했으나 그의 황금기는 너무 짧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가장 중요한 지원자였던 사스키아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그의 추락은 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의 고난은 탕자의 고난보다도 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이 된 1635년에 아들 룸바르투스가 숨졌고, 3년 뒤에는 첫째딸 코르넬리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0년에는 다시 둘째딸 코르넬리아를 잃었으며, 1942년에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인 사스키아가 사망했습니다. 절망에 빠진 렘브란트는 아들 티투스의 유모 헤이르체와 함께 살며 의지했으나 결국 상대방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것으로 그 관계는 끝이 났고, 그 후 만난 헨드리키예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지만 그 가운데 아들이 숨졌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663년에 헨드리키예조차 세상을 떠났고, 5년 후에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티투스의 결혼과 죽음을 잇달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화가로서의 그의 평판 역시 수직으로 추락했습니다. 재정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서 결국 법원으로부터 지급불능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고, 세 차례의 경매를 통해 집은 물론 소유하고 있던 작품들까지 다 팔려나갔습니다. 렘브란트가 살아온 삶은 이토록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아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렘브란트가 이토록 죽음과 가까울 정도의 고통의 심연 속에 있었기에 돌아온 탕자같은 영혼을 뒤흔드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림 속에 나오는 아버지가 보여주는 세상을 초월한 인자함과 평온함은 삶의 모든 고통을 모조리 체험한 렘브란트 자신의 삶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것이지요. 나우웬은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지체장애자들을 돌보는 단체인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 생을 마감한 실천 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이 돌아온 탕자를 평생 자신의 거처에 붙여 놓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명화 안에는 인간과 인생의 깊이가 있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고, 이해와 공감과 치유를 일으키는 힘이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이러한 요소들은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는 아버지의 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두 손을 새롭게 조명하여 한 손은 아비의 손으로, 한 손은 어미의 손으로 해석한 이는 역시 나우웬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손은 정말 판이합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억세 보입니다. 손가락을 펼쳐 탕자의 어깨와 등을 상당 부분 가리고 있습니다. 마디마디에 적잖이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띕니다. 특히 엄지손가락이 그렇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어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왼손으로 이들을 다독이는 모습에서는 부드러움이 넘치지만 그러쥔 느낌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오른손은 아주 딴판입니다.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 아들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고 해야 할까요?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상처투성이의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은 강인한 아버지의 손으로, 동시에 어머니의 손은 더없이 따듯한 손으로 그려 넣었다는 사실에 저 역시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자식에 대하여 부모의 마음은 그런 것이겠지요.
인간에게 꼭 채워져야 하는 심리적 욕구에 대해서 말한 심리학자는 하인즈 코헛(Heniz Kohut)입니다. 코헛은 우리 인간이 두 가지의 심리적 욕구가 채워져야 건강한 개인으로 성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사랑 받는, 존중 받는, 인정받는 욕구인 반영 욕구와 보호 받는, 안전을 느낄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욕구인 이상화 욕구입니다. 무조건적으로 한없이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고, 보살펴주는 사람과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하게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아이들은 강건한 자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보며 예뻐 어쩔 줄 모르고, 놀라워하고, 감동을 받고, 눈을 마주치며 너의 존재는 축복이다. 선물이다. 내게 큰 기쁨이다. 너는 존귀하며 사랑스러운 피조물이다! 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이가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자존감과 꿈을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너를 지킬 것이다. 너는 안전하다. 나는 너를 위해 버티고 있다! 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 아이는 크고 높은 이상을 지닌 강건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많이 배운 부모가 강건하고 단단한 아이를 키워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환경이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마음입니다. 사랑과 보호입니다. 쉼을 주는 품과 힘을 주는 손입니다. 그림 속 탕자의 아버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사랑해주고, 받아주고, 품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넘어졌더라도,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서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로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해줄 수 있는 가족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5월의 아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사랑하고 있다고, 네가 최고라고, 우리는 항상 네 옆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담은 두 손으로 꼭 안아준 후 세상으로 내보내야 합니다.